"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4).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까지도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겨우 그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사도들보다 힘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도들의 헌신적인 복음 전도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계속 그 십자가와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접 보았는가, 보지 못했는가?",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배웠는가?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진 경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복음 그 자체이며, 우리는 지금도 복음을 경험함으로써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초대교회의 생사각오의 힘 있는 선포가 사라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있은 지 이천 년이나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경험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죄악된 백성들을 쓸어 버리지 않으시고 남겨 두시는 이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 땅에 살려 두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기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만물의 영장답게 다스리고,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게 하시려고 그 견디기 힘든 죄악의 광경들을 보시면서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 중대한 일을 직접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의 기쁨을 먼저 깨달은 우리들을 통해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만 돌보고 살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 누가 복음 전도의 사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슬픔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하기
바울이 전수받은 것은 예수님이 직접 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 방식으로 그 역시 누구에게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