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심하게 반발하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해야지 왜 자꾸 '죄'를 거론하며 사람들이 정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짧은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죄에 대하여 아주 강하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교인 한 사람이 목사님 댁으로 직접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제 설교에서는 죄에 대하여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안 그래도 교회에 잘 나오지 않으려 하는 우리 아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는 아예 교회에 발걸음도 하기 싫다고 합니다. 제발 앞으로는 그렇게 솔직하고 무섭게 죄에 대해 말씀하지 마세요."
이 충고를 듣고 목사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일어서서 약장으로 가 '극약'이라고 쓰인 약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인에게 약병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성도님의 말씀은 이 약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바꾸라는 말씀이시죠? 그런데 제가 이 독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떼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이거나, 아예 아무 표시도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참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아예 어떤 이들은 교회가 죄라는 말을 빼고 윤리적인 말이나 철학적인 지식들을 이야기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는 딱지를 떼버리라는 말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죄는 우리의 인생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주범이며, 우리가 주의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를 커다란 고통 속으로 몰고 갈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고 싶다면 반드시 죄에 대한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는 사람 안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남겼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죄책과 오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접근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진흙 구덩이로 뛰어들었다고 칩시다. 그는 법을 어겼으므로 정해진 과태료를 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과태료를 납부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기 전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더러워진 옷과 몸도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즉, 과태료를 물게 된 상태가 죄책이라면, 더러워져서 씻을 필요가 있게 된 상태가 오염인 것입니다.
이처럼 죄책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져야 하는 책임으로, 형벌에 떨어뜨리는 죄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입니다. 그리고 오염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부패성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은 이 죄책과 오염을 숙명적으로 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인간 내면에 미친 영향입니다.
깊이 생각하기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범죄로 인간 안에는 죄책과 오염이 남게 되었습니다. 죄책이란 죄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을, 오염이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부패성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주의 깊게 성찰해 보며 죄의 파괴력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